회보글

현재위치 > 홈 > 어린이책과삶> 회보글


TOTAL ARTICLE : 71, TOTAL PAGE : 1 / 4
구분 마중물 | 기획특집 | 지회/연대 | 사는이야기 | 책이야기 | 기타자료 |
기획특집 : [제34호]자유롭게 크면 자기를 발견하는가
 변춘희(송파)  | 2014·08·26 21:13 | HIT : 651 | VOTE : 128
엄기호 열린강의 정리
                                      자유롭게 크면 자기를 발견하는가

                                                                                            정리 / 편집팀

저는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에서 교육과 문화, 세계화, 대중문화, 문학을 중심으로 인류학적인 방법론, 인류학적인 사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로 중·고등학교 중심의 교육에 관심이 있고 유아와 초등은 제가 많이 아는 영역은 아니지만 결합을 시켜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김영삼정권때 시작되어 지난 20년 동안 시행된 자기주도 학습이라고 알려진 교육방법론에 책읽기와 육아를 포함해서 정말 괜찮고 좋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처음 자기주도 학습, 자유학습이 소개 되었을 때 아주 열광했어요. 사람은 스스로 크는 거고 애들한테 자유를 주면 알아서 잘 클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대안학교를 비롯해서 그렇게 자란 친구들이 졸업하고 대학을 가거나 하면서 당혹스러운 결과가 나오고,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던 부모를 중심으로 후폭풍을 겪으면서 훨씬 보수적으로 되고 말았어요.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얘기하려고 합니다.
명백하게 인정하고 출발해야 할 것은 한국사회에서 누가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있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그 관심의 실체는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명백하게 한국의 교육은 중산층들이 주도하고 있어요. 경제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문화적으로도 문화자본을 가진 중산층들이죠. 교육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까지 교육에서 소외되고 돌보지 않았던 학생들의 경험, 언어, 감수성 이런 걸 중심으로 교육정책을 짜야 하는데 한국교육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이건 진보와 보수에 상관없는 일이죠.
예를 들어 학교에서 아이가 배가 아파서 집에 가려고 하는 경우 중산층의 아이가 선생에게 가서 말을 할 때와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는 공부 못하는 아이가 선생에게 얘기할 때 완전히 다른 언어로 얘기해요. 그런데 학교에서 누구의 언어는 소통되고 누구의 언어는 억압당하고 말로 인정되지 않는 걸 점검해 봐야 해요. 교육은 모르는 사람, 포메이션이 안 된 사람에게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학교는 말의 민주성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에요. 여기 계시는 분들도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는 이유는 또박또박, 말의 어조가 한쪽에 몰리지 않고, 주술 구조에 맞고,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소위 범생이들이 말하면 선생님들은 그냥 보내줘요. 왜냐하면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학생이 얘기를 하거든요. “선생님, 저 어제 주꾸미를 먹었는데 어제 저녁부터 좀 안 좋더니 배가 아픕니다. 그래도 좀 참아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집에 좀 보내주세요.” 이러면 다 보내줍니다. 그런데 소위 날나리라던가 딱중간이라던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선생님한테 가서 “선생님 보내줘요.” “왜?” “배가 아픈데… 아! 그냥 보내줘요.” 이러거든요. 이런 건 말로 인정받지 못해요. 말에 대한 폭력은 말과 말 아닌 것을 구분하는데서 출발하거든요. 말의 민주성이 없는 학교예요. 말의 내용에 어떤 가치를 담고 있냐는 두 번째 문제이고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차분하고 정갈하게 쓰기를 바라는 거죠. 여기까지 가는 과정이 폭력이에요.
체험학습을 갈 때는 사람은 머리만 굴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야한다고 강조하지만 체험학습을 갔다 오면 글을 쓰라고 하지요. ‘재밌었다’는 네 자 말고 쓸 말이 없는데 그렇게 쓰면 온갖 탄압이 들어오죠. “생각한건 없냐? 발견한건 없냐? 좀 더 길게 써라.”고 해서 ‘뭐가 재밌었다. 뭐뭐도 했는데 더 재밌었다. 뭐뭐뭐도 했는데 더더더 재미있었다.’ 이렇게 쓰면 글이 아니라고 하죠. 몸의 경험을 강조해서 체험학습을 했지만 결론은 의미 찾기를 바라고 있어요. 몸은 글로 가기위한 도구일 뿐 몸을 강조하는 교육조차 고도로 머리를 쓰게 하기위한 정교한 장치일 뿐이에요.
어떤 것에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지거나 재미를 느끼는 것을 경이로움이라고 해요. 체험학습에서 변화가 주는 경이로움을 발견했는데 내가 무엇에 경이로움을 발견했는가는 중요치 않고 거기서 무슨 의미를 발견했는지가 중요하고 의미로 안가면 배움의 완성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게 문화적으로 중산층이 관심있는 교육이에요. 학교의 교수방법도 중산층 중심으로 짜여 있죠. 여기서 나온 것이 자기주도 학습이에요.
저희 아파트 단지와 몇몇 아파트 단지의 사례를 보면 학교를 지을 때 초등학교는 혁신학교가 들어오길 바래요. 왕따 걱정이 적고 아이를 배려하고 숨통을 틔워주고 자유롭게 해 주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는 혁신고등학교가 들어오길 바라지 않아요. 자사고나 특목고가 들어오길 바라거든요. 혁신초등학교를 바라는 사람과 특목고를 바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완전 이율배반이잖아요. 혁신학교는 입시제도, 일제식 수업, 암기식 수업을 반대하는 것이고 특목고는 입시제도의 정점에 서있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한사람이 바라다니 정신분열증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중산층의 상당수는 자유주의자거든요. 진보적인 사람도 자유주의고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에요. 자유주의의 핵심은 국가가 나한테 간섭을 안 해야 된다는 거죠. 내가 알아서 잘 키울 수 있으니 내가 주도적으로 키우고 국가는 거기에 보조만 해 주면 된다는 거죠. 이 부분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얘가 어떤 사상을 가지느냐는 사소한 문제에요.
어릴 때는 충분히 놀고 자유롭게 크고 책에만 파묻히지 않고 들판도 좀 뛰어 다니고 아이들과 놀이도 좀 하고 이렇게 자유롭게 크면서 자기를 발견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떻게 살면 행복한지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 다양한 경험이죠. 책읽기와 공부는 그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거죠. 초등학교 고학년 전까지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창조적으로 자율적인 것을 강조해요. 한국교육의 3대 지표가 다양성, 창조성, 자율성이에요. 이건 시민운동이나 교육운동하는 쪽에서 강조하던 것이지만 놀랍게도 김영삼정부 때 교육개혁을 시작하면서 만든 교육의 3대 목표에요. 김영삼정부의 이 교육목표는 지난 15년 동안 정권과 상관없이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우리도 그렇게 키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5~6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쯤에 자기를 발견하면 그 다음에는 폭풍 성장할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자기를 발견했으니까 자기를 실현해야 되잖아요. 자기를 실현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죠.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좋아서 혹은 사회가 시켜서 하는 공부니까 타율적이고 억지로 하는 공부인거고 내 자식이 하는 공부는 지가 좋아서 하는 공부니까 밤에 12시까지 공부해도 행복할거라고 생각해요. 자율학습이 바로 이거에요. 중2나 중3때 미친 듯이 공부해서 그동안 뒤쳐졌던 걸 다 만회할거고, 그렇게 만회를 하면 당연히 특목고를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여기 찔리는 분도 계시죠.
제가 아는 시민단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의 아들이 과고를 갔는데 좋아서 자랑을 하더라고요. 공부 잘하는 거 좋아요. 공부 잘하는 게 죄 짓는 거는 아니잖아요. 자랑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분의 얘기에는 당연히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걸 깔고 있어서 불편한 거예요. 내가 우리 아이를 방목하고 딴 사람처럼 입시교육을 안 시킨 결과가 이렇게 될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렇게 커야 특목고를 가는 거고 대학을 가서도 다른 애들은 원해서 온 게 아니니까 헤매고 방황하겠지만 우리 애는 굉장히 잘할 거라는 게 기본전제예요. 이 전제의 핵심이 자기발견인거죠. 그 다음이 자기실현이구요. 요 두 가지를 축으로 해서 만든 것이 자기주도학습이죠. 자기를 발견하지 않아도 자기주도 학습이 안 되고, 자기실현을 안 하려고 해도 자기주도 학습이 안 되죠.
초등학교 고학년 부모가 되면 정말 잘 될까하는 불안이 엄습해 오죠. 왜냐면 초창기에 대안학교를 보냈거나 공교육에서도 놀리면서 키웠던 사람들은 전례가 없어서 투철한 신념으로 교육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여러 소문이 들리죠. 대안학교 가서 실패 했다는 얘기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몸을 놀게 했더니 영원히 놀고 있더라는 얘기도 들어요. 더 불안한 소식은 애가 퍼졌다는 거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몸을 놀리면 활력이 생길 줄 알았더니 널브러져 잠만 자고 의욕도 없고 답답한 거죠. 이럴 때 부모나 선생이 가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나는 네가 대학을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해. 대학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야. 나는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뭘 하고 싶어?”라고 묻는 건데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에요. 여기에는 지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게 깔려 있어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꼭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취미이면 안 되는가? 하고 싶은 일을 업무시간이 끝나고 집에서 소일거리로 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 완벽하게 빠져있어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실현해야 된다는 말에는 그것이 직업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있어요. 자기가 선택한 직업에 대해서는 온갖 열정을 다 바쳐서 살아야 된다는 전제가 있거든요. 결론은 업어 치거나 매치거나 열정적으로 살라는 거죠. 니 한 몸 바스러질 때까지 입시공부를 하라에서 니 한 몸 바스러질 때까지 니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라고 바뀐 거죠. 그런데 만약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이던지 싫어하는 것이던지 그렇게 열정을 바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좋은 건가?’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의심을 아이들이 혹은 이시대가 하고 있다면 전제가 너무 잘못된 이야기를 풀고 있는 거예요.
제가 시종일관 얘기한 것처럼 진보냐 보수냐에 상관없이 모두 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에서는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거든요. ‘죽어라 공부해서 서울대 법대를 가라’고 얘기하는 사람이나 ‘니가 좋은 게 밴드라면 밴드를 해. 대신 밴드를 죽어라 해.’ 이게 뭐가 다르냐는 거죠.
1990년 이후 한국사회는 완전한 질적 변화를 겪게 되요. 생산자본주의 시대의 삶의 모델은 겨울을 대비해서 죽어라고 일하는 개미였어요. 90년 이후 서태지가 출현하고 문화의 시대가 개막해요. 한국이라는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만들지에서 내가 더불어 살만한 사람들과 여유있게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바뀌었죠. 삶의 모델이 베짱이인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띵까띵까 하고 오늘을 즐기면서 살겠다는 거예요. 자기주도 학습에 이런 게 어떻게 포획되었냐면 처음에는 베짱이처럼 사는 걸 불안해 하다가 점점 저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단 그걸로 밥 먹고 살고 자기실현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베짱이를 어떻게 둔갑을 시켰냐면 띵까띵까 놀면 안 되고 개미처럼 미친 듯이 노는 베짱이를 탄생시켰어요.
겉모습은 개미에서 베짱이로 바뀌었지만 내용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베짱이 같은 베짱이는 절대 안 되고 개미 같은 베짱이, 이게 자기주도 학습에서 핵심으로 등장했죠. 그런데 이 모델이 흔들리거든요. 애들이 기타하겠다고 하면 손톱이 부러지도록 할 줄 알았는데 몇 줄 치다가 엎어져 자고 친구들이랑 카톡이나 하고 있어요. ‘네가 밴드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엄마가 기타도 사주고 뭐도 해줬는데 왜 이래?’ 애가 한 일주일쯤 있다가 뜬금없이 ‘엄마, 내가 밴드해 보니까 아닌 것 같아.’하면 ‘그래 다양해야지 그럼 뭐하고 싶니?’ ‘난 패션인 것 같아!’ 그런데 한 일주일 지나서 패션도 아닌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서너 번 가면 엄마가 미치는 거죠. 아이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건 인내심, 지속성 같은 거예요. 자기주도 학습의 자아실현의 핵심은 지가 좋아하는 것이고 니가 실현시키고 싶은 거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라는 건데 인내심을 가지고 있고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가뭄에 콩 나듯이 있는데 얘들은 입시공부를 위해서 인내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고 있죠. 딴 애들은 그런 경우가 정말 드물어요.
이 전제가 깨져버리니깐 불안한 거예요. 불안하니까 감시에 들어가죠. 말이 자기주도 학습이지 여기에서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어요. 저는 바뀐 게 더 끔찍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전에 교사나 부모는 모르는 걸 가르치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의 교육의 목적은 사유가 아니라 앎이에요. 알게 하는 게 중요하지 생각하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게 엄청난 병폐를 만들어 내고 있어요. 아는 걸 전달하는데 방법은 두드려 패서 전달할 수도 있고 대화로 전달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중요한 건 애가 앎의 소유자가 되게 하는 거죠. 알게 되는 과정에서 사유를 해야 된다는 건 간과 되었죠. 프랑스 속담에 ‘인간은 아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기억해 두면 좋아요. 사람은 아는 건 생각할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하죠. 사유를 강조하는 교육에서는 아냐 모르냐 얼마나 많이 아냐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유의 교육학에서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얘기하고 모르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이전에는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 알게 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자기주도 학습이 들어 설 수가 없죠. 알게 하는 교육에서는 아는 사람이 주도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주도권이 학습자 중심으로 바뀌는 자기주도 학습이 제대로 되려면 생각중심의 교육을 하면 돼요. 가르치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죠. 학생이 모르는 사람이니까 학생이 생각을 하잖아요. 그럼 학습자 중심으로 가게 되죠. 그런데 자기주도 학습이 이렇게 간 게 아니라 아이한테 ‘니가 목표를 세워봐. 니가 주도하는 거야. 니가 다 하는 거야. 나는 다만 조력자일 뿐이야’라면서 가르치는 사람은 스스로를 조력자, 멘토, 퍼실리데이터, 촉진자 라는 겸손한 위치를 취해요. 하지만 사실은 불안하니까 겸손한 위치에서 감시를 해요. 학습자가 설정해 놓은 대로 가고 있는지 안가고 있는지 계속 체크해 주고, 안가고 있으면 왜 안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이런 것 같아요 저런 것 같아요 하면서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떠니 저렇게 해보는 게 어떠니 하고 조언하죠. 이런 조언과 충고가 최악의 형태로 들어가고 있어요. 이미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거죠. 니가 자기주도 학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잘 하는지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니 입에서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거죠. 계속 감시하고 체크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게 되요.
저희 아파트에 아이러니하게도 커뮤니티센터 안에 칸막이가 있는 독서실이 있어요. 스마트폰과 앱으로 연동되어 아이가 들어가고 나가는 걸 부모에게 전송하는 CCTV를 다는데 3000가구 중에 단 한명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혁신초등학교와 특목고 사이에 바로 이 CCTV가 있어요. 혁신초등학교라는 자기발견과 특목고라는 자기실현 사이에 자기주도 학습이 있는데  자기주도 학습의 조력자라고 하지만 감시자라고 밖에 볼 수 없는 CCTV가 있는 거죠. 가르치는 사람은 말을 걸어야 되거든요. 말을 걸어야 되니까 말거는 방법을 고민해요. 지금의 자기주도 학습에서 감시자는 말을 걸 필요가 없어요. ‘제가 잘못 했어요. 제가 방향을 잘못 설정한 것 같아요. 이 수단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고백하게 하는 거거든요. 조력자도 아니고 정신분석학자에 가까워요. 정신분석학자는 아버지고 신의 역할이에요.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거리를 두고, 다 알고 있어야 해요. 학생은 신을 내면화하고 신에게 고백하듯이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교육이 워낙 획일주의적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고 학습자 중심이 아니어서 역사적으로 자기주도 학습이 나오게 된 배경은 맞는데 이게 이런 방향으로 흐를 줄 몰랐죠. 이렇게 진행이 될 때 중간 중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성하면서 보완해 가야 하는데 거의 맹신에 가깝게 자기주도 학습을 믿어왔어요. 왜 이런 걸 못했냐면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사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가르치는 것에 대해 너무 경계하고 획일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본적인 것, 공부의 목적과 책읽기의 목적을 사유로 가져와야 하는데 사유가 아니라 앎이 목적이 되면서 성찰을 못해 냈죠.
사유를 중심에 놓고 보면 좋은 책 나쁜 책 구별이 있을 수 없어요. 좋은 책 나쁜 책이 있는 게 아니라 개떡 같은 책을 갖다 놓더라도 가르치는 사람 부모나 교사와 학생 사이에 어떤 식의 관계맺음과 어떤 식의 말 걸기와 어떤 식의 대화가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해요. 그런 점에서 개떡 같은 책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게 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텍스트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단체에서 연속강좌를 기획하고 있는데 세 번에 걸쳐 강의가 너무 잘 됐어요. 그래서 평가회에 가면 할 말이 별로 없었어요. 오늘 잘했죠. 다음에도 그렇게 하자고 하고 마는데 얼마 전에 했던 강좌는 망했어요. 그 날은 평가회가 너무 재밌었어요. 사람들이 할 얘기가 너무 많은 거예요. 좋은 책 나쁜 책의 구분이 굉장히 자의적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관점이나 아이들의 경험이 전혀 반영 안 된 경우가 많아요.
한동안 우리나라 청소년 책에 아이들에게도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붐이 인적이 있어요. 밝고 건강하고 해피엔딩이 아니라 상처와 고통 이런 걸 강조한 책이 많이 나왔죠. 책을 열면 강간 얘기가 나오고 성폭력 얘기가 나와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그런 걸 안 읽혀야 된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알아야 된다고 할 때 그 알아야 하는 것이 엄청나게 정형적이고 상투적이었죠. 구체적인 상처라고 하면 꼬치꼬치 알아야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거든요. 굉장히 잔인하게 묘사해야만 구체적인 것이 아니에요. 아우슈비츠에 관한 다큐멘터리영화 중에 피해자의 시체가 단 한 구도 안 나오지만 아우슈비츠가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카메라만 돌리면 시체 나오고 카메라만 돌리면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보다 훨씬 더 사람들이 끔찍함을 느끼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하는 잘 만든 영화가 있거든요. 좋은 책과 나쁜 책의 구분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는 없지만 내가 사유하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지 내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만큼 끔찍했어 니 눈에 보여줄게 이런 건 별로 좋은 책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사유를 방해하는 책이죠.
사유를 조금만 더 설명할게요. 사유의 핵심은 공상과 몽상인데 뜬금없는 생각을 끌어내는 거죠. 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할 말이 없는 이유는 다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에요. 특별히 내가 보탤 얘기가 없는 거죠. 말걸기와 체험에서는 보탤 얘기가 떠올라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책도 보탤 얘기가 떠오르지 않으면 별로 안 좋은 책이에요.
극단적으로 자기주도 학습이 흥행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사라져 버리고 가르치는 일이 사라져버리니까 배움도 사라져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관계가 사라져 버렸어요. 가르치는 것 없이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이건 교육학적으로 위험한 이야기예요. 교사들조차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잘 얘기 안 해요. 옛날 고리타분한 교사 취급받는다고 생각하니까 멘토 혹은 조력자라고 하죠.
저는 교실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제 포지션을 밝히거든요. 자기주도 학습은 배움이 무엇인지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는 게 무엇인가를 간과하고 있어요.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어요. 낯선 것, 다른 것, 모르는 것, 두려운 것, 이제까지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것, 철학용어로 얘기하면 나와 동일하지 않은 존재를 만났을 때만 인간은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아까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르는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모르는 걸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다 알고 있는 존재거든요. 타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바깥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해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앎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타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이성애자들이 이전에는 동성애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동성애를 처음 만났을 때는 엄청난 위화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타자가 있다고 알게 되잖아요. 바깥을 통해서만 사유를 할 수 있는 거죠. 자기주도 학습에는 타자와의 만남이 빠져있어요. 자기가 주도해서 타자를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타자는 절대 자기가 주도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우연히 벼락처럼 다가와요. 911을 우리가 기획했나요? 동성애도 책이나 이런 걸 통해서 알지만 정말 나한테 이문제가 타자로서 심각하게 오려면 내 친구 중에 또는 내가 그렇다고 깨닫거나 가족 중에 커밍아웃한다거나 했을 때 확 고민하게 되죠. 정말 벼락처럼 다가와서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당한 것과 하는 것의 결합이 경험이라고 존 듀이가 교육과 민주주의에서 말했죠. 이렇게 다가오는 타자는 주도할 수가 없어요. 수동적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늘 타자가 있고 타자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하고 그런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상하게 해석하시면 안돼요. 성추행, 성폭행이 많이 일어나다보니까 낯선 걸 조심해야 된다고 가르치죠. 몸의 안전을 위해서 조심해야지요.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조심하다보니 우리는 일체의 낯섦 일체의 타자와 단절해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중·고등학생들이 새로운 선생이 오거나 전학생이 오면 호기심과 설렘을 갖지 못하고 쟤는 어떤 애일까 저 선생은 어떤 선생일까 하고 바라보지 않고, 귀찮아하고 피곤해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죠. 새로운 애가 왔으니 이제까지 내가 사귀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귀어야 되잖아요. 나를 바꾸고 내가 변해야 하는데 이게 너무 피곤하고 귀찮고 지겨운 완전 고루한 사회인거죠. 타자가 너무 두려운 거예요. 타자와의 만남을 단절하고 피하는데 배움과 성장이 가능한지 질문을 던져야 해요.
저는 수학을 예로 많이 드는데 문과에서 수학 배우신 분들에게는 영원한 타자가 있어요. 넘을 수 없는 벽이 미분적분이거든요. 저는 수학을 배우는 중에 미적분을 배울 때 가장 경이로웠어요. 차원을 넘나들 수 있다는 게 너무 경이로웠거든요. 3차 함수를 미분하면 2차원이 되잖아요.(웃음) 타자를 만났을 때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타자를 만났을 때 ‘죄송합니다.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하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는 거죠. 이 때 도망을 안 가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이에요. 가르치는 사람은 배움의 과정에서 꼭 필요해요.
첫째는 타자와의 만남이 없이는 배움이 불가능하다는 거고 둘째는 타자와의 만난 경이로움을 경이로 만나기 위해서는 그것을 먼저 경험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저는 과학을 모른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절반의 언어를 모르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수학과 과학이 왜 그렇게 재미없었냐면 자연수의 타자로 0을 받아들여야 수에 대한 확장이 되는데 자연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0을 받아들였죠. 마이너스를 이해할 때도 수직선에서 관점의 변화라는 걸 이해해야하는데 자연수식으로 이해했죠.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을 확장하는 방식으로는 어느 부분에서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요. 동성애도 마찬가지죠. 이성애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동성애를 이해하는 사람은 동성애 커플이 있으면 누가 남자인지 누가 여자인지 묻잖아요. 타자를 만나서 내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 질서를 가지고 그들을 포획하는 방식은 성장이라거나 배움이라고 볼 수 없죠. 왜 수학이 재미가 없었냐면 0을 타자로 받아들여서 그게 얼마나 경이로운지 또는 정수를 타자로 받아들여서 그게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경험한 수학교사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아이가 처음 0이라는 타자를 만난 당혹스러움을 경이로움으로 변화시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야 당혹스러움이 경이로움으로 바뀔 수 있거든요.
내가 알고 있는 질서 너머에 무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더 큰 질서가 있고, 질서를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은 더 아름다워 보일 거라는 게 있어야만 우리는 타자를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않아요. 저 사람은 나한테 또 어떤 질서를 알려줄까 또 어떤 경이로운 세상을 알려줄까 깨닫게 되는 거죠. 거기서 배우는 즐거움을 알아가죠. 거기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필요한 거죠. 가르치는 사람의 핵심은 먼저 경이로움을 느끼는 거예요. 먼저 경이로움을 느낀 사람은 안타까워요. 이걸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고 저 사람이 생각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와요.
과거에는 타자와의 만남조차도 동일성에 포획되는 방식으로 가르쳐 왔다가 이게 한계에 부딪치니까 이제 그나마도 자유의 이름으로 안하는 거죠. 그럼 정말 애들이 자유로운가 하면 오히려 감시당하고 전혀 자유롭지 않죠. 자유는 궁극적인 목표에요. 아이가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게 중요하지요. 자유를 내버려두면 잘 큰다고 희한하게 해석해요. 우리는 두 가지밖에 없어요. 줘 패거나 내버려두거나. 조련사 아니면 감시자만 있고 가르치는 사람은 사라졌어요.
말하고 듣는 관계는 ‘말하는 능력이 있다’는 동일성에서 출발해요. 자녀하고 얘기할 때 제일 화나는 순간이 내 말을 못 알아들을 때죠. 사실 문제는 애가 아니라 내 전제 때문이에요. 내 언어를 내 아이 혹은 내 학생과 공유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말을 하는데 무얼 근거로 그 아이와 내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죠.
나는 이미 알고 있는데 얘는 모르고 있잖아요. 핵심은 모르는 자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예요. 알고 있으면 가르칠 수 있는데 알고 있으면 가르칠 필요가 없죠. 이게 고유한 난점이에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말하는 능력은 공유하고 있어요. 말을 공유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능력만 공유하고 있죠. 그의 말하는 능력 속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그 말을 배울 수 있어요. 자기주도 학습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은 배우는 것이 전부고 가르치는 것이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승인권이 배우는 자에게 있다는 거죠. 자기주도 학습은 배우는 자에게 승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 전부라고 하면서 가르치는 것을 무화시켜 버린 거죠. 가르치는 자의 수고와 노력은 어떻게 성립되느냐면 배우는 자에게 달려 있어요. 언제까지 가르쳐야 되냐면 배우자가 그게 그거군요라고 말할 때까지 가르쳐야 하는 거죠. 이건 가르치고 배움이 모두 있는 것에서 승인권을 배우는 자에게 준 거죠.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타자성에 근거하고 있어요.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타자성이 중요한데 가르치는 자가 타자로 나타나야 해요. 부모나 교사가 타자로 나타날 때만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어요. 자기주도학습은 이런 타자성을 거세해 버렸고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이 동질자로 나타나요. 교육에서 타자성이 사라져 버렸고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도 자신을 타자로 내보이지 않죠. 학교에서 학생들을 때리는 학생주임같은 사람은 타자가 아니에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때리는지 언제 피해야하는지 언제 기분 나쁜지 알잖아요.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데 똑같은 존재로 가는 친구 같은 교사 ,친구 같은 부모에서 핵심은 친구는 영원한 타자여야 된다는 거죠. 친구를 동무라고 하는데 같을 동(同)에 없을 무(無)자로 해석해서 같은 게 없는 게 동무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타자를 피하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낯선 것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교육이죠. 가르치는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타자와의 만남을 경이로움으로 끌어 올릴 수 있어요.
  
71 기획특집   [제36호] 세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변춘희(송파) 14·08·26 1349 136
70 마중물   [제36호] 우리는 지금 ‘밀양 송전탑’이라는 책을 함께 읽고 있다  변춘희(송파) 14·08·26 1287 145
69 기획특집   [제35호]특목고-자사고, 보내도 죄 못 보내도 죄?  변춘희(송파) 14·08·26 813 140
68 마중물   [제35호] 각자의 꿈으로 함께 살아가기  변춘희(송파) 14·08·26 611 131
기획특집   [제34호]자유롭게 크면 자기를 발견하는가  변춘희(송파) 14·08·26 651 128
66 마중물   [제34호] 함께 하는 즐거움, 연대!  변춘희(송파) 14·08·26 575 124
65 기획특집   [제33호]우리는 생각하며 산다  변춘희(송파) 14·08·26 575 126
64 마중물   [제33호] 너희가 독서를 아느냐  변춘희(송파) 14·08·26 559 123
63 기획특집   [제32호] 나를 멈추고 다시 걷게 한 것들  변춘희(송파) 14·08·26 670 118
62 마중물   [제32호] ‘당위’에 딴죽 걸기  변춘희(송파) 14·08·26 641 128
61 기획특집   [제31호]인권친화적학교+너머를 위한 10가지 약속  변춘희(송파) 14·08·26 617 127
60 마중물   [제31호]다 아는 이야기  변춘희(송파) 14·08·26 549 127
59 기획특집   [제26호] 즐거운 책토론, 행복한 삶 (1)  관리자 12·04·04 799 173
58 마중물   [제26호] 학교폭력 근절 대책 발표를 보며  관리자 12·04·04 677 195
57 마중물   [제25호] 경계를 넘어  관리자 12·03·30 693 200
56 마중물   [제24호] 너는 누구냐? 1  관리자 12·03·29 634 159
55 마중물   [제23호] 지금, 어디쯤에 계세요?  관리자 12·03·29 641 182
54 마중물   [제22호] 빗소리를 듣습니다  관리자 12·03·29 625 157
53 마중물   [제21호] 나도 영혼의 성장을 즐기고, 소박한 삶의 결을 향유하는 행복한 마녀가 되고 싶다 1  관리자 12·03·29 636 164
52 마중물   [제20호]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관리자 12·03·29 668 191
1234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